유럽 현대미술관 여행 2011 6/26-7/12 - 008
글쓴이 : 큰사과나무    작성일 : 2012-07-24    조회수 : 15002 첨부파일 : VFREVF8z.jpg
유럽 현대미술관 여행 2011 6/26-7/12 - 008

파리 노르드역에 내리니 새로운 가이드 김귀영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파리에 대해서 누에고치에서 비단실 뽑아내듯 설명을 하신다.

파리는 이쁜아가씨와 같아서 가만히 있어도 남자들이 줄을 서는것처럼 별다른 홍보를

안해도 관광객들이 물밀듯이 몰려오는 파리는 불친절한 도시다.

그냥 그러려니 해야 한다.

소매치기도 많다.

관광객이 많이 오므로 파리주위의 못사는 나라에서 노는형들이 몰려와서 한몫잡아 먹고 산다.

관광객이 쓸수 있는 공짜 화장실이 없다.

고층건물은 37M로 제한했고 석조건물 25M로 균일하다.

간판, 건물색깔 규제를 한다.



프랑스혁명으로 왕조가 붕괴됐고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브르봉) 왕조는 정치, 경제, 사회등 전반에 걸쳐 불합리한 상태였다.

소수2%의 왕족과 성직자와 귀족이 전국토의 40%를 차지하고 98%인 평민들이 조세와 교회에 대한 헌금,

봉건적인 부역의 의무까지 지고 있으면서도 정치적으로 철저히 소외되었고, 평민의 상층부엔 귀족못지않은

경제력을 가진 시민계급 (부르주아)이 있었으나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것은 마찬가지였다고.

사회적 모순에 대한 계몽사상가들의 계몽과 미국 독립전쟁에 크게 자극받은 시민들이 국왕의 국민의회 탄압에 항거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함으로서 혁명은 폭발되었다.

특권계급의 조세상의 특전, 영주재판권등 봉건적 특권을 폐지하여 봉건적 예속관계를 해체시켰고, 인권선언으로

자유, 평등,주권재민, 및, 사유재산의 불가침 원칙을 확인하였단다.







프랑스의 도시계획은 19세기 중반 나폴레옹3세때인 1853년 파리 지사인 오스만 남작을 임명하여 도시계획을 시작하였다고.

하수도, 도로, 전기, 가스, 상수도용 파이프 가설까지 현대적 시설이 약 160년 전에 지하에 정비를 하였다니 놀랍기만 하다.

우리나라에서, 특히 연말에 도로를 파헤치고 이런 저런 공사를 하는것을 생각하니 비교된다 비교돼...ㅠ

나중에는 전화선은 물론이고, 편지를 전용캡슐에 담은뒤 파이프 입구에 집어 넣고 핸들을 당겨 공기의 압력으로

다음 우체국까지 날아가게 만들어 1870년대까지 280만통의 우편물을 배달할 수 있었단다.





개선문은 1806년 나폴레옹의 명령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어 30년 걸려 완성된 기념 건축물.

1805년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연합군과 맞서싸운 오스테를리츠전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세웠단다.

높이 약 50M, 폭은 약 45M로 벽면에 새겨진 큰 글씨는 나폴레옹이 참가한 전쟁이름, 작은 글씨는 장군들 이름,

사망한 군인은 이름에 밑줄을 그었고 날개달린 부조엔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에즈의 가사가 새겨졌단다.

원래 개선문이 세워져 있는 샤를 드골 에뚜왈 광장은 다섯개의 길이 나있는 오거리였는데 1854년 파리 도시계획을 담당한

오스만 남작에 의해 12개의 길이 나게 되어 그모양이 별을 닮았다 하여 별의 광장이라고 불린다고.

개선문 지하엔 무명용사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으며 개선문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하에 난 길을 통해 가게 되어있다.

이문을 건설하라고 명한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의 실패로 실각, 유배지를 전전하다 1840년 주검이 되어 개선으로 파리에 들어왔단다.



쾰른에서 파리까지 오는데 3시간이 넘게 걸려 어느덧 점심때, 파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식당으로 이동하였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인데 김치도 맛있고 미역국은 아닌것 같은데 맛있는 국이 아마 메생이국이 아닐까?

흰쌀밥에 돼지고기 요리와 후식으로 오렌지까지 맛있게 먹었다.



오랑쥬리 미술관으로 갔는데 오랑쥬리는 겨울철 루브르 궁전의 오렌지나무를 보관하는 정원이었단다.

1927년 개관하였고 모네 수련 연작으로 유명하다.

자연광아래서 감상하게 할것, 작품을 일반에게 공개할것을 조건으로 작품을 기증했는데 원통형방 2개에

그림이 365도로 돌아가며 전시가 되어 있었다.

백내장을 앓을때 그린 모네 최후의 작품이란다.

모네가 기증한 수련 연작은 보는 각도나 햇빛에 따라 달라 보인다고.


모네는, 평생 외롭게 산 고흐에 비하면 인간관계가 좋아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단다.

어렸을 적 바닷가에서 자란 모네는 변화무쌍한 노르망디의 날씨를 직접 체험하면서 자연에 대한 참신한

통찰력이 생겨 15세때 이미 풍자만화를 팔아서 직업화가의 반열에 들었단다.

외젠 부당이라는 스승을 만나 야외에서 그림 그리기를 권유받았는데 야외의 자연광선에 대한 그의 감각과

화가로서의 타고나 재능이, 눈에 보이는대로 표현하는 새로운 미술 세계를 연 계기가 된 것이다.

1874년 화가, 조각가, 판화가 무명예술가 협회전에 '해돋이 인상' (impression sunrise)을 출품한데서 미술기자가

인상파 전람회라고 조롱섞인 기사를 쓴것에서 인상파란 이름이 붙혀졌단다.

모네는 인상을 캔버스에 채집하려면 야외에서 햇살이 나뭇잎에 비쳤다가 사라지기까지 7분이 걸리므로

대상을 꼼꼼하게 묘사할 시간이 없다.

재빠르게 붓질하지 않으면 순간적인 대기의 인상을 포착할 수 없다고 말했단다.

모네는 평생, 빛이 사물의 형태와 색채를 결정짓는 요소라는 것을 그림으로 증명에 몰두하였단다.


로뎅 갤러리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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