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현대미술관 여행 2011년 6월 27일-2
글쓴이 : 사과나무    작성일 : 2018-02-07    조회수 : 18807
독일 대통령이 집무하는 건물을 지날때 강물이 보였는데 가이드의 말이 히틀러 운하란다. 독일 군함이 북쪽으로 항해할때 덴마크 반도를 돌아가야하는 불편함을 덜어주는 군사적 목적에 의해 1887-95년에 건설되었는데 1907-14년에 확장되어 대형군함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단다. 운하 가장자리에 작가들의 작품이 설치 되어 있었다. 건물엔 5-7%의 예술품 설치가 의무적으로 할당되어 건물도 박물관처럼 세계적인 거물 작품들이 많이 있단다. 여행자유화를 요구하는 동독시민들의 시위가 1989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계속되자 동독정부는 뭔가 시위대를 달랠 정책을 발표할 수 밖에 없었다. 동독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샤보브스키는 이 기자회견에서 동독인들의 해외여행 절차를 간소화하는 행정조치를 발표할 계획이었다. 주변국외에 동서독 국경을 통한 출국도 가능케 하는것등이 주요 내용이었는데 이전의 정책과 비교해 특별한 내용이라곤 여권 발급 기간을 단축한다는것 뿐이었다고. 문제는 당지도부가 새 여행 규정을 결정하는 동안 휴가로 자리를 비웠다가 기자회견 당일에야 문서를 건네받아 대변인 샤보브스키가 새조치를 숙지하지 못한 상태로 회견장에 나섰다는 점이었다. 그가 여행 자유화에 대해 운을 떼자 기자들이 벌떼처럼 질문을 던졌다. "의미가 뭔가?" "언제 발효되나" 등등. 쏟아지는 질문에 당황했고 마침 한 이태리 기자가 그정책이 언제부터 유효한지를 물었는데 들고 들어간 문서를 정신없이 뒤적이다가 아무 생각 없이 "지금부터 바로!" 라고 대답했단다. (It's now... Immediately.") 그의 즉석 답변에 귀를 쫑긋 세운 기자들은 발표 내용이 국경 개방을 뜻하며 그것도 즉시 효력이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이탈리아 기자는 본국으로 급전을 쳤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미국기자들도 덩달아 "내일부터 당장 동 베를린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을 통과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날밤 (1989.11.9) 서독 TV는 외신을 짜깁기하여 "동독이 드디어 국경을 개방했다."고 애매한 보도를 내보냈다. 뉴스를 시청한 동독 시민들은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갔다. 국경 수비대가 저지했지만 동독 주민들은 "뉴스도 못들였냐?"고 오히려 따져 물었다고. 황당한 국경수비대는 발포를 해서라도 인파를 해산시켜야할지 옥신각신하다가 검문절차를 포기하고 국경을 개방했다. 동독주민들이 장벽을 올라타 넘어가기 시작했고, 흥분한 주민들은 도끼, 망치를 들고 나와 아예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고. 세베를린쪽 젊은이들도 망치로 벽을 같이 부수기 시작했단다. 이로서 베를린 장벽은 역사의 유물이 되었다. 시나고그는 유대인의 종교는 물론이고 행정, 교육, 사교의 중심지란다. 유대인이 있는 곳이면 세계 어느곳에도 시나고그는 있다고.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지고 나서부터 토요일 해가질때 까지란다. 이때는 사진을 찍어도 안되고, 글씨를 써서도 안되고, 불도 켜서는 안되고, 엘리베이터도 자동으로 층층이 선단다. 예배는 생각보다 훨씬 자유로운데 아이들이 떠들고 사람들도 이야기하고 기도하고 자유스러워 독일에선 소란스러울때 유대인 회당같다고 말한단다. 우리가 호떡집에 불났다고 말하듯이. 햇빛이 나니, 독일인들이 잔듸에서 일광욕을 하고, 카페에서도 안에서 음식을 먹기보다 밖으로 나와 길을 바라보며 음식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신기했다. 매상을 올리기위해 가게밖에 의자를 내놓았다기보다 햇빛에 굶주린(?) 사람들을 배려함이랄까? 숲속에서 누드로 일광욕을 하기도 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나서 숲속을 지날때 차창밖을 고개를 빼고 이리기웃 저리기웃 하였다. 국립박물관과 베를린 시청을 지나갔는데 시청에 붉은 벽돌 시계탑이 있었다. 겉으로 화려하지 않아도 내실있고 튼튼하다는 가이드의 말씀대로 정말 튼튼해보이고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2011년 11월 15일 15;05 올림)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