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현대미술관 여행 2011 6/26-7/12 - 0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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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큰사과나무 작성일 : 2012-07-24 조회수 : 271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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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시 모닝콜.
7시 아침식사. 7시 50분 로비에서 만나기. 호텔 체크 아웃. 호텔에서 아침으로 매실 음료만 마시고 빵과 요구르트와 과일을 챙겨오다. 초고속 열차 EUROSTAR를 타고 로마 테르미니 역으로 오다. 차창으로 보이는 밭에 옥수수가 많이 심겨져 있다. 테르미니는 종착역이란 뜻. 오토바이가 많다. 바티칸으로 가다. 바티칸 박물관으로 들어가려고 관광객들이 줄을 서있다.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로마 관광지를 연결한 사진을 1유로에 팔길래 사서 기다리는 사이에 그림을 구경하였다. 길가의 가로수로 소나무가 많은데 밑의 가지는 자연낙지인지, 전정을 한 것인지 위에만 가지가 있는 것이 진짜 브로콜리 같다. 소나무는 햇빛을 좋아하는 나무라서 인간이 개입 하지 않는 숲에선 잎이 큰 활엽수한테 치여서 자꾸 산꼭대기로 옮겨가는 추세인데 크게 자란 소나무가 가로수로 많이 있는게 인상적이다. 그런데 한국의 좀 작달막하면서도 운치있게 구부러진 모습이 껑쩡한 이태리 소나무보다 더 뽀대난다. 이태리에선 전봇대를 못 세우게 돼 있어서 나무와 나무 사이를 연결해 가로등으로 쓴다는 가이드님의 말씀. 바티칸 박물관 입구에 오니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얼굴이 있다. 라파엘로는 팔레트를 들고 있고 미켈란젤로는 망치와 끌을 들고 있다. 그만큼 그들의 작품이 많다는 뜻이라고.
바티칸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다. 인구는 약 1000면 정도인데 하루 관광객은 수만명. 면적은 0.44제곱km로 한바퀴 도는데 1시간 30분 정도 걸리고 200m짜리 기찻길도 있고 우체국도 있단다. 이태리의 우체국이 심이 흐린데 비하면 바티칸의 우체국은 일처리가 정확한 편이라니 독일에서 쓴 부치지 못한 엽서를 여기서 부쳐야겠다. 오디오 가이드에 8개국 언어가 있다는데 그중에 한국어도 있다고.!!! 바티칸도 엄연히 하나의 국가이다. 검색대를 통과해서 흉기, 칼, 폭탄등이 있나 검사하고 옷차림도 조신하게 민소매나 무릎이 드러나는 반바지나 치마를 입으면 안된단다. 수신기를 가져올 사람이 아직 안와서 기다리다가 들어갔는데 박물관 건물안으로 들어오니 수신기가 도착했다. 관광객이 워낙 많아 연두색 깃발을 들고 다녔다. 바티칸 박물관의 작품이 훌륭한게 많아 스탕달 신드롬을 일으키는 작품들이 있단다. 스탕달 신드롬은 유명한 미술품을 감상한 사람들 중에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뛰거나 격렬한 흥분, 우울증, 현기증, 위경련, 전신마비등을 일으키는 증상으로 피렌체에선 매년 평균 12명이 스탕달 신드롬을 경험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단다. 스탕달 신드롬이란 말을 나오게 한 그림은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화인데 베아트리체 첸치(1577.2.6-1599.9.11)는 천사도 시기할만큼 아름다웠다는데 아버지가 14살때부터 겁탈을 하여 눈물과 고통속에 살다가 교회에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했단다. 아버지는 자기 망신을 시켰다고 별장으로 내쫓기까지 했다고. 나중에 별장을 방문한 아버지를 새엄마와 두명의 가신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죽였는데 교황의 치안대가 사건을 조사하여 사형을 선고했다고. 로마 시민들이 정당방위라고 항의를 해서 형 집행이 잠시 연기되었으나 교황 클레멘트 8세는 전혀 자비의 손길을 내리지 않았다고. 그가 여론의 반대를 무릎쓰고 사형선고를 내린것은 첸체가의 재산을 탐내서였다고. ![]() 사형이 집행되던 1599.9.11일 아침 8시 단두대가 있는 산탄젤로 다리위로 로마제1의 미인이 죽는것을 보려고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였다던가? 그중에 화가 귀도 레니도 있었는데 마지막 모습을 초상화로 남겼다. 1817년 이탈리아 페렌체에 있는 산타크로체 성당에서 레니가 그린 베아트리체 첸치의 작품을 감상하고 나온던 스탕달은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황홀경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일기에 적어 놓은데서 스탕달 신드롬이란 말이 생겨났단다. 참고로 스탕달신드롬을 치료하는데 한달이나 걸렸다고. 귀도 레니가 그린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피에타하면 미켈란젤로. 그만큼 훌륭한 작품이 된것은 재료를 구입할때부터 정성이 달랐기 때문이었을까? 미켈란젤로는 피에타를 조각할 대리석을 채석장에서 직접 골랐단다. 사교성도 없고 성질이 좀 까칠한 편이었던 미켈란젤로는 작업장과 채석장에 있을때 젤 행복해 했단다. 피에타를 감상하려면 360˚로 돌아가면서 감상을 해야 한단다. 하늘에서 바라보는 예수님의 얼굴엔 보일듯 말듯 미소를 짓고 있다고 가이드님이 말한다. 25살의 청년 미켈란젤로가 약 3년에 걸쳐 피에타를 완성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던 미켈란젤로가 관람객 사이에서 듣고 있는데 아무도 미켈란젤로가 만든 줄을 모를뿐더러 엉뚱한 사람이 만들었을거라는 말을 듣고 빈정이 상한 미켈란젤로. 한 성질하는 그가 밤에 망치와 끌을 가지고 와서 피렌체 출신 미켈란젤로가 만들었다고 새기고 나서 뿌듯해서 밖으로 나오니 생애 가장 아름다운 아침 노을을 본다. 아름다운 하늘을 만드신 분은 서명이 없는데 내가 교만했구나. 그 이후론 미켈란젤로는 이니셜을 새기지 않았단다. 피에타상을 조각한 뒤로 미켈란젤로의 명성이 높아졌는데 십자가에서 죽은 아들을 내려서 엄마의 품에 안은 모습이 애잔하면서도 아름답다. 33살 아들의 어머니치곤 너무 애띤 얼굴이라 말이 많았다는데 미켈란젤로가 말하길 순결한 여자들이 젊음을 더 잘 유지한다고 성모 마리아의 동안인 이유를 설명했단다. 1972년 헝가리 출신 조각가 지망생이 망치를 휘둘러 성모님의 팔과 코와 눈을 망가뜨린뒤부터 방탄 유리안으로 모시게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가 돌아가신뒤 으뜸사도로 포교하다 네로 황제의 박해때 순교했는데 예수님과 감히 똑같이 죽을수는 없다하여 머리가 아래로 가는 거꾸로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셨다. 326년 성베드로의 무덤위에 최초의 성당인 베드로 대성전이 지어졌다가 16세기에 개축을 하였다.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의 예수님의 변용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제롬 성인의 그림은 구두 수선공 재료함 뚜껑에서 발견했단다. 성인이 돌로 가슴을 내리쳤다가 고통속에서 다시 치려고 하던 순간을 그린것이라고. 제롬 성인을 그린 그림의 특징은 사자와 성서, 해골과 돌이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단다.
바티칸의 다음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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